갑옷털을 입고 노란고름을 주렁주렁 달고 다녔던 길고양이 '향기'

  • 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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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6-15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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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서 길고양이들을 돌본지 7년 정도 되었습니다. 옆 동네 캣맘분이 어느 날 연락하시더니 아픈 고양이가 있다며 제게 한탄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구조해서 치료하길 부탁드렸지만 해줄 수 있는 건 밥 주는 것뿐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도 모른척 하고싶었지만, 이 아이의 사진을 본 후 마음은 이미 구조하기로 하였습니다.


몰골이 거지꼴이라 진짜 외면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상태였습니다. 아이를 다시 보게 되면 연락 달라 얘기를 하였고 다음 날 아이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전해 듣곤 다행히 옆 동네라 20분 만에 도착하였습니다. 실물을 마주 한순간 진짜 탄식이 나오더라고요.

구내염으로 입 주변에 노란고름을 주렁주렁 달고 노숙자를 연상케 하는 털은 갑옷 그 자체였으며 얼마를 못 먹었던 것인지 등뼈가 다 보일 정도로 뼈만 앙상했던 어떻게 살아있었는지 신기할 정도였습니다. 기력도 하나 없이 곧 죽어도 이상치 않아 보이던 강한 첫인상에 꼭 잡혀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포획틀을 설치하였고 떨어져서 지켜본 지 한 시간쯤 지났나, 세상 다 산 것 같은 모습에 포획틀에도 안 들어갈 거 같던 아이가 살려달라는 신호였던 것인지 감사하게도 포획틀에 들어가 주었습니다. 


동물병원 가기엔 시간이 촉박할 거 같아 당일은 집으로 데리고 와 하룻밤 같이 보냈습니다. 입에서 피까지 토하며 시궁창에 빠졌다 온 거 같은 냄새가 말도 못해 좀 곤욕스러웠지만, 얌전히 잘 있어 주어 고마운 세상 착하고 순둥한 그런 아이였습니다. 이름도 냄새가 아닌 좋은 향기만 나라는 뜻으로 향기로 지었습니다.

향기는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일찍 동물병원에 가 진정 후 검진을 하였는데 역시나 구내염을 비롯해 얼마를 못 먹었던 것인지 심한 탈수와 빈혈, 염증 수치도 높고 하여 수술은 당장 못하고 당분간 컨디션 좀 끌어 올린 후 전발치 수술을 해야 한다 하셨습니다.


다 큰 성묘인데도 2킬로 중반밖에 나가질 않아 고비를 잘 넘길 수 있을지 걱정은 되었지만 살기 위해 만난 향기이니 잘 버텨줄 거라 믿었습니다. 입원한지 일주일 후 수술할 수 있을 정도의 컨디션을 만들고 무사히 전발치를 마쳤습니다. 입안에 포도 알갱이 같은 염증을 비롯해 구강 안쪽에 육아종이라는 커다란 혹도 있어 레이저 술도 같이 하였다고 합니다. 육아종이 재발하는지 잘 지켜보라 하셨고 구내염이라는 게 발치를 함으로써 나아지기도 하지만 향기는 워낙 심한 상태여서 평생 약으로 관리해야 할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수술은 잘되었지만 향기에겐 큰 수술이었기에 입원을 하여 회복기를 좀 거친 후 보름 만에 집으로 왔습니다. 침 흘림 증상도 없어지고 밥도 잘 먹으며 며칠이나 지났다고 살도 좀 붙은듯합니다. 구조첫날에 비하면 환골탈태했는데 갑옷 정리를 좀 해 달랠걸 그랬나 싶기도 하고 그렇지만 제눈엔 너무 예쁜 향기입니다.

워낙 기력이 없어 얌전한지 알았는데 원래 착한 거 같습니다. 어느 정도 손길을 받아들이거든요. 좀 더 친해지면 바리깡으로 손수 밀어 드려야 할 거 같아요. 향기는 제가 입양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걱정했던 육아종이나 향기의 구내염이 워낙 심해서 약을 달고 살지 알았는데 약 한 달이 지난 지금 약 먹지도 않을 만큼 치료 효과가 아주 좋습니다. 침 흘림이 전혀 없고 밥도 잘 먹고 있거든요. 덕분에 3킬로도 채 나가지 않던 향기가 지금은 오동통 살이 제법 오른 게 보입니다. 또한, 겁이 많아서 온전히 만질 순 없지만 쓰드듬음이나 가끔 빗질은 받아들여 노숙자를 연상케 하던 향기가 너무 예뻐졌어요.

집 아이들과 합사도 잘 되었고요. 평온한 일상입니다 ^^ 사랑받으면 이렇게 예뻐지는 아이들입니다. 보란 듯이 향기 건강하게 잘 키우도록 하겠습니다. 이 모든 게 카라 덕분이에요. 혼자서는 감당하지 못했을 일인데 정말 감사합니다.


길 위에서 죽음을 맞이할 뻔했던 향기를 구조해 꾸준히 돌보며 치료해주신 구조자분께 감사드립니다. 악취가 나고 갑옷털을 입었던 향기의 기적처럼 멀끔해진 변화가 감동적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만난 새생명 향기의 소식을 이렇게 전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좋은 향기만 나는 향기로 건강하고 행복한 묘생을 살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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