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자료] 하느님, 기독교 그리고 육식

  • 박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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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0-31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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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00

하느님, 기독교 그리고 육식

 



필자 : Kathy Freston

번역 : Stella Yim

원문 : http://m.huffpost.com/us/entry/3874652 


 


얼마 전부터 난 나의 식습관을 영적 믿음을 실천하려는 방법으로서 고려하기 시작했다. 무엇이 나에게 가장 맞을까를 고민하면서, 나는 수많은 내적 갈등에 휩싸였다. 


미국 남부에서 교회를 다니며 자랐던 나는, 교회 사람들과 이런저런 자리에서 바베큐 파티를 자주 했으며 일요일 브런치로는 달걀과 그릿 (grits: 굵게 빻은 옥수수, 미국 남부에서 흔히 즐겨 먹는 음식)을 즐겨 먹었다.


그때 당시에는 이런 자리들이 그저 정겹고 따뜻하기만 했기에 훗날 이렇게 많은 (좋은) 사람들이 열정을 가지고 매일 즐기는 육류, 유제품, 달걀이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는 점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해야 했다.


오래된 신앙의 습관들이 육식을 받아들였다면, 나는 왜 그 것들에 반기를 들었을까?

 

많은 동물이 우리의 식탁 위에 음식이 된다. 그 과정에서 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난 다큐멘터리 비디오들을 봤다. 다큐멘터리들을 본 후, 그 동물들을 먹는다는 생각을 하면 정신적으로 괴로워졌다.

 

내가 세계 평화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이렇게 시스템화 된 잔인함과 고통에서 한 부분을 차지하면서 평화를 외칠 수 있을까? 이런 괴로움이 지속되는 일에 한통속이 되면서 내가 어떻게 내적으로 평화스러워 질 수 있을까? 라는 질문들이 나를 서서히 갉아먹었다. 

 

조금 더 깊이 묵상할수록 좀 더 명확해지기 시작했다. 육식에서 멀어지려는 선택은 내 신체 건강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의 웰빙을 위해서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이건 깨어있고 자각하는 영적 수행을 하는데 있어서도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난 단순히 동물들을 괴롭히는데 동참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육식을 멀리함으로써 나는 내가 원하는 인간상에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전통을 상기해보자면, 몇 천 년을 견뎌낸 종교는 어떻게 우리가 우리와 같은피조물인 동물들과 어떻게 관계가 있으냐는 지극히 기본적인 질문을 되새겨 보지 않았을까? 어찌되었든 동물들은 전적으로 인간의 힘 안에 있다. 영성이라는 것은 어떻게 약자를 대우하느냐에 대한 문제를 포함하고 있지 않던가?

 


나는 조사를 해보기로 했다. 육식에 대해 무어라고 제안되어 있는지를 알아내기 위한 자기 탐구와 기독교 전통에 대한 조사를 말이다.

 

첫째로 명확해진 점은 인간이 육식을 하는 것이 도덕적인가 아닌가에 대한 의문이 고려되어 왔다는 것이

다. 지금까지 시대를 거치며 종교의 리더들이 동물을 도살하고 먹는 동시에 평화적이고 인간적임을 지지하는 것을 따르는 것에 대한 내재된 모순과 오랫동안 씨름을 한 것으로 보였다.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 딜레마는 굉장히 중요하다. 이건 성경에서 제일 첫 부분인 창세기 에서도 언급이 되고 있다. 심지어 십계명이 나오기도 전이다.


이 부분에 따르면,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인간으로 부터 이 지구와 지구 상에 있는 생물을 관리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번째로는 선언을 하였는데, 그 내용은

 

“자, 내가 너희에게 온 지면에 있는 씨 맺는 모든 초목과 씨 맺는 나무 열매가 있는 모든 나무를 준다; 이것이 너의 양식이 될 것이다.”(창세기 1:29~30)

 

이는 분명 채식주의로의 부름이라고 생각한다.

 

미국 하버드 신학교와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현재 샌 디에고 대학에서 신학, 종교학 교수인 애론 그로스 (Aaron Gross, Ph.D) 박사는 나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누군가 비교 종교학을 공부할 때 가장 두드러지는 것 중의 하나는 육식의 잠재적인 도덕성 위험이 종교적 전통을 가로지르는 주된 테마라는 것이다. 육식은 종종 비난받는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에서 보이듯 많은 경고와 제한에 둘러싸여 있다.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학자인 미르체아 엘리아데 (Mircea Eliade)는 고대 사냥꾼이 사살한 동물에게 가진 연민이 종교의 기원 중 하나라고 주장한다.“

 

동물을 먹는다는 것이 가볍게 여겨졌던 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오늘날, 기독교 신학자들이 우리의 음식과 영적 선택의 연결고리를 재발견하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채식주의는 자비와 연민 같은 기독교의 가치와 가장 잘 맞는다고 주장한다. 영국 성공회 신부이자 옥스포드  대학의 교수인 앤드류 린지 박사는 (Andrew Linzey, Ph.D.) 이렇게 주장한다, “예수와 함께 한다는 것은… 곧 주님의 생을 존경한다는 것이다…예수와 함께 한다는 것은 약자들에 대한 연민을 실천한다는 것이며 옳은 것이라고 생각되는 원칙들에 맞서는 것이다.”


린지 박사에게 이는 곧 기독교인은 채식주의자가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린지 박사와 같은 신학자들은 초기 기독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육식을 금해 온 오랜 전통의 일부분임을 나는 알게 되었다.


4세기 기독교 성인들이었던 황야의 교부도 (The Desert Fathers) 육류를 거부했다. 수도승 단련의 기둥과 같은, 1,500년 전통의 ‘베네딕트 수도 교칙’ (“Rule of Benedict”)에서도 육식은 엄격히 제한되어 있다. 이러한 영향 아래 현대의 많은 수도회들은 (특히 동방 기독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채식주의자이다.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 (1182-1226) 등 몇몇 후세대 기독교 리더들은 최대한 육류를 거부했었던 반 채식주의자였다. 감리교 설립자인 존 웨즐리 (John Wesley, 1703-0791) 를 포함한 또 다른 몇몇은 완전한 채식주의자였다. 그 밖에 많은 리더들이 일정 기간 동안 채식주의자였다. 오늘날까지도 카톨릭에서는 부활절 전의 기간인 렌트(Lent) 동안 육류를 제한적으로나 완전히 포기하는 전통이 활기차다.



현대 기독교 채식주의는 보통 창조물 학대에 대한 윤리적 고려에 근원을 둔 것이긴 하나, 역사적으로 봤을 때 일부러 고기를 먹지 않았던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식습관을 좀 더 위대한 영성과 좀 더 나은 성스러움으로 가는 길로도 여겼다.


채식을 영적 신념의 한 부분으로 포함하는 풍부한 전통을 배우면서 나는 솔직히 처음에는 의외였고 놀랐지만, 많이 기뻤다. 이것을 알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미국에는 거의 없다. 만약 당신이 내가 했던 것처럼 약간의 조사를 해보거나 혹은 간단하게 인터넷에 “기독교와 채식주의”라고만 검색해보아도 기독교 윤리에서 모든 피조물간의 평화라는 개념이 얼마나 중요한지 쉽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은 성경의 첫 30구절 이상 찾아볼 필요도 없다. 내가 이 글 앞에서 언급했던, 창세기 1:29-30구절에서 말하는, 가장 이상적인 식습관은 비육식이라는 사실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성경 번역가들이 지난 천 년 동안 동의한 부분이다.


본디 세상에 대한 비전은 인간이 동물을 먹지 않고 대신 나무와 땅에서 자라나는 음식을 선물로 받고 사는 것이었다.


성서의 설명에 따르면 인간은 타락한 이후에야 원래의 완전함으로 돌아가려는 갈망에서 이상적 존재인 동물을 먹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는 예언자 이사야가 세상이 다시 완벽해지는 시대에 대해서 예언한 성경 구절이 있다: “이리가 실제로 어린 숫양과 함께 얼마간 거하고… 사자도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다 (이사야 11: 6~7)."


그가 한 말을 토대로 봤을 때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육식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또한 채식주의자로 변해가는 것이 완벽히 이해가 간다. 창세기 9장에서 인간에게 육식을 허용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어하는 기독교인들은 창세기 첫장에 나와 있는 채식주의의 선포를 종종 간과하곤 한다. 그래서 나는 그 육식을 “허용" 하는 부분이 성경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보기로 했다.

 

모든 논평자들이 동의하는 한 가지는 훗날 육식을 허용한 것이 하느님이 창세기에서 채식을 선포한 것이 ‘작은 실수’이며 도살장을 유익한 것으로 생각했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에서 육식을 허락하는 것은 인간의 나약함에 대한 양보라고 묘사되어 있음을 기독교와 유대인 논평자들은 오랫동안 가르쳐왔다. 육식이 허용되는 구절에서는 동물들에게서 모든 피 (고대 생명의 상징)를 반드시 뽑아야 한다고 나와 있다. 아직도 거의 모든 도살장에서 동물의 피를 뽑고 있다.


처음에는 이게 특이하다고 생각했지만, 학자들은 이 부분을 이렇게 해석한다. 하나님의 원래 계획에는 육식이 없었다는 것을 인간에게 상기시키기 위해서라는 것과 육식 전, 피를 뽑는 행위로 생명을 존경하는 마음을 기억해야 함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고기를 먹는 데에 완벽한 자유를 주기보다는 성경은 이와 같은 제한을 뒀다.

 

그렇다면 극심한 감금과 산업적인 도살장이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도 육식이 결코 쉽게 지지되지 않았다는 말인데, 그럼 공장식 축산에서의 처참한 삶과 도살장에서의 고통스러운 죽음이 있는 오늘날은 어떤 제안이 있을 수 있을까? 요약하자면, 예수는 공장식 축산을 어떻게 생각할까?


고대의 목동들이 육식을 했던 것은 그 시대상황상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저 다양한 메뉴를 고르거나 슈퍼마켓에서 그냥 손만 뻗는 것으로도 충분한데, 기독교인으로서 좀 더 평화적인 방법을 택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많은 것들이 조금 더 명확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다녔던 교회들이 가르쳤던 예수의 삶에 관한 모든 것들- 창조물, 자비, 연민에 대한 사랑과 나약한 자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이 말이다. 그러한 예수의 삶은 내가 비디오에서 봤던 동물들이 겪는 고통에 일조하는 식단을 예수가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날 인도했다.


결국 궁극의 선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가 수조가 넘는 피조물들이 해마다 겪어야 하는 고통을 부추기는 생활습관을 어떻게 인정할 수 있을 것인가. 2000년 전의 예수는 엄격한 채식주의자가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오늘날의 예수는 채식주의자이지 않을까라는 확신을 가진다. 

 

영적 수행에 대해서 말하자면, 바울은 데살로니가서에 쓴 첫 편지에 쉬지말고 기도하라고 말한다. 바울이 뜻한 것은 우리가 계속 우리의 머리를 숙인 채 기도를 읊으라는 뜻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말은 우리가 우리를 안내한 사람들처럼 살기를 노력하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음식은 우리 삶에서 중요하기에 의식적으로 먹는 것은 곧 의식적인 삶을 사는 기초가 될 수 있지 않을까라고 난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끊임없이 기도하는 길이 될 수도 있다.

 

나는 예수회 신부인 존 디어 (John Dear)가 한 설명이 다시 생각났다.

그는 말했다.

 

“오늘날 예수는… 우리로 하여금 완전한 육체적, 영적, 정신적, 그리고 도덕적 일체를 추구하기 위해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을 바꾸길 원하실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식사하기 위해 앉을 때… 채식을 함으로써 그가 살았던 연민과 비폭력주의의 삶을 따라가기를 선택해야 한다.”

 

그는 또 덧붙인다.

 

“우리가 서로에게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에게 자비를 베풂으로써 예수가 팔복에서 약속했듯 우리도 자비와 축복을 받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기독교의 가르침인 동물에 대한 연민은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 (St. Francis of Assisi)에 의해 특히 더 두드러졌다. 그는 동물에 대한 연민을 유려하게 말했을 뿐만 아니라 동물에게 베푸는 친절은 영적으로 좋으며 사람들 사이에서 평화를 장려한다고 가르쳤다.

 

“우리의 신도들인 동물들을 해하지 않는 것은 그들에게 가지는 우리의 첫 번째 의무이지만 거기서 머무는 건 부족하다. 우리에겐 더 큰 임무가 있다: 그들이 필요로 할 때마다 봉사하는 것이다. 혹 하나님의 피조물들을 연민과 동정의 피난처에서 제외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다른 인간들에게도 똑같이 대할 것이다.”

 

그래서 난 영적인 선택과 마주쳤다.


댓글 2

조수영 2013-11-01 10:15

아! 정말 반가운 소식입니다! 혹시 그 분들 사이트나 블로그 등을 소개받을 수 있을까요? 그 분야를 공부해보고픈 마음이 커서요~^^


박상희 2013-10-31 22:16

우리나라에도 동물신학을 연구하신 분들이 계세요. 카라 동물사랑 교과서에도 한 꼭지 들어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