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칼럼니스트 조수영님의 두 번째 칼럼이랍니다. 읽고 추천 눌러주시면, 동물에 무관심한 많은 분들에게도 전달될 수 있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 http://blog.daum.net/projecta2013/43  조수영의 Animals cry 물고기의 눈물  조수영 동물권연구활동모임 프로젝트 "A" 칼럼니스트   "동물도 운다" -제프리 무세이프 메이슨-     오늘도 점심을 먹으러 사무실을 나섰습니다. 늘 그렇듯이 점심으로 ‘먹을 것이 없습니다.’ 고기를 먹지 않는 저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습니다. 고기와 계란을 뺀 비빔밥이나 야채로만 말은 김밥, 야채죽 정도가 저의 사무실 근처에서 먹을 수 있는 전부입니다. 1년 정도 비건(육류, 어류, 계란, 유제품 등을 먹지 않는 채식주의자)을 유지하다가 생선과 유제품을 먹은 지 6개월. 얼마 전부터 다시 비건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 중에 있습니다. 집에서는 될수록 비건을 유지하려고 하지만 외부에서 지인들과 식사를 할 때는 해물을 조금씩 먹기도 합니다. 한국에서 비건을 유지하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Silent Scream/PETA  오늘은 먹을 만한 다른 식단이 있나 싶어 근처 골목을 잠시 걸어보았습니다. 모퉁이를 도니 점심으로 회덮밥을 파는 횟집이 나타납니다. 어차피 제가 먹을 만한 식단도 아닌데 횟집 앞에서 발이 멈추어졌습니다. 입구 옆에 작은 수조가 놓여 있고 그 안에 물고기 한 마리가 머리를 위쪽으로 든 채 계속 입을 뻐끔거리고 있습니다. 한 눈에 보아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닙니다. 수조는 물고기가 헤엄치기에 턱없이 비좁고 물은 뿌옇습니다. 그 안에서 물고기가 정상인 것이 더 이상할 것 같습니다. 비건을 유지하던 때, 횟집 혹은"> 의 칼럼니스트 조수영님의 두 번째 칼럼이랍니다. 읽고 추천 눌러주시면, 동물에 무관심한 많은 분들에게도 전달될 수 있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 http://blog.daum.net/projecta2013/43  조수영의 Animals cry 물고기의 눈물  조수영 동물권연구활동모임 프로젝트 "A" 칼럼니스트   "동물도 운다" -제프리 무세이프 메이슨-     오늘도 점심을 먹으러 사무실을 나섰습니다. 늘 그렇듯이 점심으로 ‘먹을 것이 없습니다.’ 고기를 먹지 않는 저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습니다. 고기와 계란을 뺀 비빔밥이나 야채로만 말은 김밥, 야채죽 정도가 저의 사무실 근처에서 먹을 수 있는 전부입니다. 1년 정도 비건(육류, 어류, 계란, 유제품 등을 먹지 않는 채식주의자)을 유지하다가 생선과 유제품을 먹은 지 6개월. 얼마 전부터 다시 비건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 중에 있습니다. 집에서는 될수록 비건을 유지하려고 하지만 외부에서 지인들과 식사를 할 때는 해물을 조금씩 먹기도 합니다. 한국에서 비건을 유지하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Silent Scream/PETA  오늘은 먹을 만한 다른 식단이 있나 싶어 근처 골목을 잠시 걸어보았습니다. 모퉁이를 도니 점심으로 회덮밥을 파는 횟집이 나타납니다. 어차피 제가 먹을 만한 식단도 아닌데 횟집 앞에서 발이 멈추어졌습니다. 입구 옆에 작은 수조가 놓여 있고 그 안에 물고기 한 마리가 머리를 위쪽으로 든 채 계속 입을 뻐끔거리고 있습니다. 한 눈에 보아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닙니다. 수조는 물고기가 헤엄치기에 턱없이 비좁고 물은 뿌옇습니다. 그 안에서 물고기가 정상인 것이 더 이상할 것 같습니다. 비건을 유지하던 때, 횟집 혹은">

[조수영의 Animals cry] 물고기의 눈물

  • 박수진
  • |
  • 2013-09-13 19:29
  • |
  • 1766

몇몇 사람들이 모여 함께 만들고 있는 작은 동물권 단체 <동물권연구활동모임 프로젝트 "A">의 칼럼니스트 조수영님의 두 번째 칼럼이랍니다. 읽고 추천 눌러주시면, 동물에 무관심한 많은 분들에게도 전달될 수 있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 http://blog.daum.net/projecta2013/43 



조수영의 Animals cry



물고기의 눈물 



조수영

동물권연구활동모임 프로젝트 "A" 칼럼니스트


 


"동물도 운다"

-제프리 무세이프 메이슨-

 

 

오늘도 점심을 먹으러 사무실을 나섰습니다.


늘 그렇듯이 점심으로 ‘먹을 것이 없습니다.’ 고기를 먹지 않는 저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습니다. 고기와 계란을 뺀 비빔밥이나 야채로만 말은 김밥, 야채죽 정도가 저의 사무실 근처에서 먹을 수 있는 전부입니다.




1년 정도 비건(육류, 어류, 계란, 유제품 등을 먹지 않는 채식주의자)을 유지하다가 생선과 유제품을 먹은 지 6개월. 얼마 전부터 다시 비건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 중에 있습니다. 집에서는 될수록 비건을 유지하려고 하지만 외부에서 지인들과 식사를 할 때는 해물을 조금씩 먹기도 합니다. 한국에서 비건을 유지하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Silent Scream/PETA 


오늘은 먹을 만한 다른 식단이 있나 싶어 근처 골목을 잠시 걸어보았습니다.


모퉁이를 도니 점심으로 회덮밥을 파는 횟집이 나타납니다. 어차피 제가 먹을 만한 식단도 아닌데 횟집 앞에서 발이 멈추어졌습니다.


입구 옆에 작은 수조가 놓여 있고 그 안에 물고기 한 마리가 머리를 위쪽으로 든 채 계속 입을 뻐끔거리고 있습니다. 한 눈에 보아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닙니다.


수조는 물고기가 헤엄치기에 턱없이 비좁고 물은 뿌옇습니다. 그 안에서 물고기가 정상인 것이 더 이상할 것 같습니다.


비건을 유지하던 때, 횟집 혹은 낙지나 쭈꾸미 요릿집 앞을 지날 때마다 이러한 광경은 저를 무척 괴롭히곤 했습니다. 눈을 제대로 뜨고 보기가 힘들 지경이었지요. 어떤 횟집의 수조는 담겨있는 물이 회오리처럼 빙빙 돌아가고 있기도 했습니다. 더럽고 비좁은 수조에서 물고기들끼리 부딪히며 회오리에 휩쓸리는 광경이란.


죽음을 기다리는 순간마저 너무 참담했습니다.

 

제가 원래부터 동물에게 그리 민감한 사람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누구보다 고기 먹기를 즐겼고 심지어는 보신탕도 두어 번 먹어보았던 경험이 있습니다.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초등학생이었을 때만 해도 소가 불쌍하다며 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많은 아이들이 태생적으로 동물에게 친밀감과 동정심을 느끼듯 저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세월이 지나면서 일주일에 한 두 번은 꼭 고기를 구워먹어야 하는 젊은이가 되어있었습니다.


고기는 나에게 ‘먹을거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고기가 식탁에 오르기 전에는 ‘살아있는 생명’이었다는 엄연한 사실도, 나의 먹을거리가 되기 위해 목숨을 내어주었다는 가슴 아픈 사실도 저의 마음을 깊이 건드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제가 비건이 되었던 계기는 동물들이 어떻게 키워지고 도살되어지는지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공장식 축산과 도살장. 이 두 단어는 나의 뇌리에 절대 사라지지 않도록 새겨졌고 저는 그 날로 고기 먹기를 중단했습니다.


제가 몸서리쳤던 부분은 동물들의 육체적인 고통보다도 감정적, 정신적인 고통이었습니다. 살아오면서 제가 겪어본 고통이 육체적인 것보다도 감정적, 정신적인 부분에 치우쳐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아파트처럼 죽 늘어서 있는 A4용지만한 닭장에 몇 마리가 가두어져 날개를 펴는 것은 고사하고 똑바로 앉아있을 수조차 없는 상태에서 달걀만 낳다가 ‘생산량’이 줄어들면 바로 ‘폐기’처분되는 산란계. 그들은 고통을 이기지 못해 부리로 서로를 쪼아댑니다.


먹이에 섞여 있는 독한 항생제도 그들을 병에서 구하지는 못합니다. 아파트처럼 생긴 닭장은 각 층의 바닥이 숭숭 뚫려 있는데 오물이 그대로 밑으로 빠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닭들은 꼼짝없이 갇힌 채 위층의 오물을 그대로 뒤집어씁니다. 흙을 밟도록 되어 있는 닭들의 발가락은 숭숭 뚫린 철장을 움켜진 채 굽어 갑니다. 닭은 생명이 아니라 달걀 낳는 기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돼지도 상황은 다르지 않습니다. (이러한 비교를 싫어하기는 하지만) 어린아이만큼이나 지능이 높은 돼지는 ‘스톨’이라 불리는 철제 틀 안에서 한 번 돌아서지도 못한 채 도살되기 직전까지 삽니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오염된 공기와 햇볕도 들지 않는 ‘축사’ 안에서 비정상적이게 살이 찌워지다가 ‘도살되기 적절한’ 몸무게가 되면 도살장으로 가면서 처음 햇빛을 보기도 합니다. 그들의 몸 역시 항생제가 들어간 사료와 성장 호르몬으로 살찌워지며(모든 동물의 자연스런 먹을거리는 ‘사료’가 아님을 숙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시멘트 바닥 위에서 관절이 상해 일어나지 못하는 돼지도 많습니다.


암컷이 새끼를 낳으면 어미와 새끼는 분리된 틀에 갇힌 채 젖만 겨우 먹일 수 있습니다. 암컷이 새끼를 밟아서 죽게 만드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인데 자유로운 상태에서의 어미는 새끼를 죽게 만드는 일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우유를 제공하는 젖소는 어떠할까요. 젖소는 365일 젖이 나오게 창조된 신비의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젖소가 우유를 내기 위해서는 ‘임신’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계속 강제적으로 임신을 당합니다.


태어난 새끼가 암컷이면 어미의 젖을 먹는 대신 분유를 먹고 응당 새끼의 몫이어야 할 우유는 인간이 가져갑니다. 새끼와 어미는 곧 분리됩니다. 어미는 일 년 내내 우유를 짜내느라 늘 유선염에 시달립니다. 당연히 항생제가 섞인 사료를 먹습니다.


새끼가 수컷일 때는 상황이 더욱 비참합니다. 수컷은 태어나자마자 어디론가 내던져 져 죽음을 맞이하던가 ‘송아지 고기’가 되기 위해 철분이 함유되어 있지 않은 사료를 먹다가 자라기도 전에 죽음을 맞습니다. 연하고 부드러워야 하는 송아지 고기의 특성 상 당연히 움직임은 철저하게 제한되어 자기 고개도 돌릴 수 없을 정도의 공간에서 짧은 생을 삽니다. 우유 생산량이 줄어든 젖소는 도살장으로 끌려가 햄버거 패티에 들어가는 값싼 ‘갈은 고기’가 되고요.


대부분의 동물들처럼 모성애가 지극한 어미 소는 새끼와 분리될 때면 미친 듯이 울부짖습니다. 새끼가 끌려간 방향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몇날 며칠을 울기도 한답니다. 그러나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우유 짜는 작업과 또 다른 임신입니다.


물고기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양식장은 공장식 축산과 별 다름이 없고, 모든 도살이 그러하듯 그들의 죽음도 고통스럽고 비참합니다. 흘리는 피의 양이 적다는 것 정도가 차이점일까요.

(공장식 축산의 실상에 대한 더 자세한 글은 여기서 참조하실 수 있습니다.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6415§ion=sc3)

 

그들이 육체적인 고통 뿐 아니라 정신적, 감정적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육식은 동물들이 겪는 고통의 집합체라는 충격은 더 이상 그들을 나의 ‘먹을거리’일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닭과 돼지, 소가 느끼고 있을 고통은 고스란히 내가 경험했던 고통에 오버랩 되었습니다. 고통의 내용이 다르다고 해서, 서로 간의 생물학적 차이가 있다고 해서 고통의 깊이가 다를 것 같지 않았습니다. ‘고통을 느낀다’는 사실이 중요했고 그 사실은 나의 식생활을 비롯한 많은 부분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동물이 고통을 느낀다는 학설은 이제 정설이 되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생물체보다 ‘지성적이라고 자부하는 인간 동물’의 역사를 통틀어 볼 때 ‘비인간 동물’의 고통을 인정하게 된 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17세기의 철학자 데카르트는 동물이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단언했습니다. 개가 산 채로 배가 갈라지며 내는 울부짖음은 버튼을 누르면 작동하는 기계처럼 입력되어 있는 시스템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들은 실제로 그런 실험을 하기도 했습니다. 육체의 단말마마저 입력시스템이라고 생각했으니 감정적, 정신적인 고통에 대한 고려는 들어설 자리마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앞서가는 국가의 동물보호, 복지조항을 보면 동물의 육체적 고통 뿐 아니라 정신적 고통도 포유류에 한해 분명한 고려의 대상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동물이 ‘고통’만을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현재 과학이 밝혀낸 범위 안에서, 적어도 포유류에 속한 동물들은 고통 뿐 아니라 기쁨, 슬픔, 사랑, 행복, 평안, 충만, 수치심, 향수, 절망, 고독, 흥분, 기대, 이타심, 감사, 지루함, 아름다움, 재미, 분노, 자신감, 의기소침, 즐거움, 미안함, 만족, 불만족, 못마땅함, 그리움, 심술, 인내, 놀람, 자만, 모욕감, 죄책감, 우울 등의 다양한 감정을 느낍니다.


동물을 의인화하는 것이 금기시 되어 있는 과학계의 관례로 인하여 동물의 감정에 대한 연구는 매우 더디게 진행되어 왔습니다.


1960년대에 제인 구달이 야생의 침팬지를 연구하면서 사용한 ‘사춘기’, ‘기분’, ‘사랑’, ‘흥분’이라는 단어에 학계의 비난이 쏟아진 이후 아주 조금씩 바뀌어 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만 해도 동물에게 마음이나 생각, 감정이 있다고 발언하는 것은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동물들은 ‘그것’이라고 불렸지요.


현재에는 포유류 뿐 아니라 조류, 파충류 그리고 어류에 속하는 동물들도 감정을 느낀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코끼리가 울고 있을 때’의 저자인 심리학자 ‘제프리 무세이프 메이슨’은 자신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즉 동물도 사랑을 하고, 고통을 느끼며,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며, 기대로 가슴이 부푸는가 하면 실망으로 의기소침해진다는 것이다. 동물은 고독감을 느끼고, 사랑에 빠지며, 실망과 호기심을 느낀다. 지난날을 회상하며 향수에 젖고 미래의 행복을 기대하기도 한다. 동물도 감정을 느낀다.”

 

“어떤 코끼리 한 마리는 쥐를 반려동물로 기르고 있으며, 어떤 침팬지는 죽은 제 새끼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어떤 곰은 지는 태양을 넋 놓고 바라보며, 어떤 들소는 얼음 위에서 미끄럼을 타기도 한다. 어떤 앵무새는 자신이 지껄이는 말의 뜻을 알고 있으며, 어떤 돌고래는 자신이 고안해낸 놀이를 한다.”

 

저명한 동물행동학자인 마크 베코프는 자신의 책 ‘동물에게 귀 기울이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인간이 감정적 느낌을 발전시켜온 유일한 동물이라는 주장은 분명히 편협한 생각일 것이다. 실제로, 진화론적 생물학은 그것이 사실일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일부 사람들은 동물들은 서로에 대해 진정으로 사랑을 느끼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감정이 이전의 진화 과정 없이, 즉 동물들 사이의 사랑이라는 진화 과정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인간에게만 나타났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

 

“한 마디로 동물의 감정을 부인하는 것은 그들 존재의 대부분을 부인하는 것이다.”

 

학계가 그래왔던 것처럼 대부분의 사람들도 동물이 인간만큼이나 복잡한 감정과 정서를 지니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거나 인정치 않고, 동물 대부분의 행동을 ‘본능’이라 치부해 버립니다. 동물이 짝짓기를 하는 것은 ‘사랑’에 빠져서가 아니라 번식을 위한 (시스템화 되어 있는)본능에 의해서라는 식입니다.


이러한 시각은 인간이 여러 방면으로 동물을 학대하는데 이용되어 왔습니다. 동물의 감정에 대한 무지와 부인은 인간으로 하여금 동물을 처참한 환경 안에서 여러 목적으로 착취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합니다.

  

제인 구달은 마크 베코프의 ‘동물에게 귀 기울이기’ 서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동물들이 풍부한 감정적 생활을 영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들이 자아인식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들이 육체적 고통은 물론 정신적 고통까지 느낄지도 모른다는 생각, 단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수많은 동물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가하고 있는 인간의 행동양식에 깊은 혼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동물은 감정을 느끼고, 각기 다른 성격과 개성을 가지고 있으며(같은 종의 동물이라 할지라도) 그에 따라 행동양식이 다릅니다. 같은 종에 속하는 인간들이 각기 다른 성격과 개성을 가지며 그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듯이 말이지요.


인간을 군상으로 치부하여 몰개성화 시키는 사고가 옳지 않듯 동물도 개체 하나 하나가 유일한 생명체임을 아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점심시간, 횟집 수조에서 보았던 물고기는 과연 어떠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을까요.


물고기가 육체적 고통을 느낀다는 사실에는 많은 과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하지만 감정을 느낀다는 부분에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마크 베코프와 같은 동물행동학자들은 물고기도 감정을 느낀다고 주장하는 반면, 전뇌, 신피질 등을 연구하는 신경생물학자들은 물고기가 감정을 갖지 못한다거나 혹은 감정을 가질 수는 있어도 그것을 ‘느낄 수는 없다’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짝을 맺을 상대방을 고르고 구애를 하는 물고기들이 비참한 환경에서 어떠한 감정도 느끼지 못한다는 주장은 저에게는 어불성설로 들립니다.


한 생명이 행동, 생각, 감정을 작동하는 방식은 현재 과학의 수준을 넘어선, 더욱 총제적인 무언가라고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고기가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이 단지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이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요.


과학은 늘 사실보다 느립니다.


불과 반세기 전에는 포유류도 감정이 없는 존재였습니다.

머지않은 시대에 물고기도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 밝혀질지 모릅니다.


낚시 바늘에 걸릴 때 고통스러움과 이별의 슬픔에 울고, 자신의 무리 안에서 헤엄치며 


댓글이 없습니다.